만주대륙을 가다-고대사의 쟁점지④내몽고 파림좌기ㆍ시린궈러멍
시린하오터(錫林浩特)시의 몽원문화박물관에 전시된 몽골족 생활 모형@축제뉴스d/b |
※편집자주=이 글은 지난 7월 26일부터 8월 5일까지 10박 11일동안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에서 주관한 요하 답사를 동행하며 얻은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한 기사이다. '요하문명(遼河文明)'을 주제로 한 이번 답사는 북경을 거쳐 하북성 노룡현, 요녕성 조양시, 내몽골 적봉시, 파림좌기, 시린궈러멍(锡林郭勒盟), 산서성 다퉁(大同)시와 만리장성 거용관(居庸關)을 지나는 여정이었다. 이 가운데 독자들의 관심이 높은 고대사의 쟁점이 된 지역들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논점을 정리해 소개해 본다. 주요 정보는 한가람연구소와 동행에 참가한 여러 지인들의 설명과 평소 필자의 견해를 섞은 것임을 밝혀 두며, 혹시라도 오기나 잘못된 내용은 언제라도 보완ㆍ수정할 것을 약속드리는 바이다.
적봉시에서 파림좌기(巴林左旗) 가는 길부터는 대초원의 길이 펼쳐진다. 농업은 불가능하고 오로지 목축업만 가능할 듯한 초원의 길이다. 특히 파림좌기에서 시린궈러맹까지는 윈도우 초화면에 나오는 대초원의 이미지를 연상케 하는 푸른 초원이 끝간데 없이 펼쳐진다. 군데군데 양떼들과 말들이 간간이 보일 뿐 인적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특이한 것은 사람의 모습이 보여도 이제는 말을 타는 대신 트럭과 자동차를 이용해 목축을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여기도 시대가 변하고 있는 것이다.
내몽고에 들어와서는 몽골글자도 눈에 띈다. 시내 간판에도 몽골문자가 병기데 있는 곳이 많다. 서울의 간판에 영어 문자가 한글과 병기돼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몽골문자는 13세기 초에 칭기스칸이 위구르를 정복하면서 위구르문자를 받아들여 쿠빌라이 때 개량해 만들었다고 한다. 서울의 삼전도비에 새겨져 있는 청나라가 썻던 만주 문자도 이 몽골문자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한다.
서너시간을 걸쳐 일행이 도착한 파림좌기는 내몽고의 도시중 하나인데 요나라 수도 상경이 있던 곳이다. 시내에서 까까운 곳에 있는 요상경 성터는 토성인데 대분분의 초원의 성들이 그러하듯 남아 있는 건물은 거의 없다. 대신 전후좌우 1~2km에 달하는 거대한 성터의 윤곽만 보일 뿐이다. 그런데 이 곳이 옛 고구려의 성터가 있었던 곳이라고 한가람연구소의 이덕일 소장이 설명해 준다. 어쩌면 고구려의 성터를 토대로 요나라가 수도를 건설했을 수도 있는 일이다.
혹자는 또 이곳이 발해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가 있던 자리이고 근처의 파림우기(巴林右旗)는 발해국의 첫 도읍이었던 중경 현덕부(中京顯德府)가 있던 곳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파림우기나 파림좌기나 청나라 팔기군(八旗軍)의 군사편제에서 나온 용어로 요하의 지류인 시라무렌(西拉木倫) 강을 앞에 두고 좌우로 펼쳐져 있다. 그러나 파림좌기는 지금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요나라 수도로서만 유적공원화되어 버렸고, 다만 고구려성이나 발해성의 특징인 치(雉)만이 하나 뚜렷이 남아 과거의 역사를 증거해 줄 뿐이다.
이 소장은 또 이 곳이 고려 태조왕이 한사군을 몰아내기 위해 공격했던 서안평(西安平) 자리로도 비정된다고 말해 준다. 강단사학자들이 주장하듯 서안평이 압록강 하구가 아니라 요하 서쪽 초원지대라는 것이 특이했다. 사서에는 고구려가 서안평을 여러 차례 공략했다는 기록이 나오지만 그 위치가 불확실해 아직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서기 146년(태조왕 94) 8월에 서안평을 공격하여 마침 이곳을 지나던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 242년(동천왕 16)에도 서안평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삼국지』 「위서」 등에 보인다. 이 지역은 마침내 311년(미천왕 12) 고구려의 영역으로 병합되었다. 그 결과 고립된 낙랑군과 대방군은 각각 313년과 314년 미천왕 때 고구려군에 의해 병탄됐다.
고구려는 이 서안평을 교두보로 삼아 '다물(多勿)' 사상에 따라 지속적으로 서진 정책을 펼쳤다. 다물이 최초로 나오는 기록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동명성왕조인데,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옛 땅'은 당연히 고조선의 강역을 말한다. 그 땅은 만리장성 너머 황하 일대와 산동반도를 지나 양자강 유역에까지 미친다. 낙랑군과 대방군이 있던 '녹색 회랑지대'를 100여년간 점거했던 삼연(三燕)은 고구려 장수왕 때 북연을 끝으로 멸망(438년) 한다. 이 때 고구려와 함께 '녹색 회랑지대'를 노리던 북위(北魏)도 오랜 힘겨루기 끝에 만리장성 이남으로 물러나고 마침내 이 곳은 고구려의 강역으로 떨어진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적어도 장수왕대인 5세기 말 고구려는 난하 또는 갈석산 너머까지 진출하였다고 유추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고구려 전성기 때 유주(幽州 ; 지금의 북경 일대) 자사의 무덤이 북한에서 발견되고, 수 양제와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시 대규모 군대를 집결시킨 곳이 북경 근처 탁군(涿郡)이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고구려 국경에서 가까운 곳을 놔두고 일부러 먼 곳에 군대를 모을 이유가 없다고 한가람연구소의 홍의삼 연구위원이 강조한다.
요나라(916-1125년)는 거란족의 야율아보기가 세운 나라로 907년 당(唐)의 멸망 이후 스스로 황제임을 선포하고 몽골ㆍ만주ㆍ화북의 일부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남방의 송나라와 병립하며, 북방의 맹주로서 위세를 떨치다 1125년 금나라와 송나라의 협공으로 멸망할 때까지 200여년간 존속하였다. 잘 알려진대로 고려를 세 차례나 침범했다가 강강찬 장군의 귀주대첩으로 큰 타격을 입어 국력이 급속히 쇠약해졌다. 왕족인 야율대석이 중앙아시아로 도망하여 서요(西遼)를 세우기도 했다.
일행은 허허로이 상경 유적지를 한 바퀴 돌아보고 나서 요상경 박물관을 찾아 요나라가 남긴 유물들을 둘러 보았다.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도 발해를 본 떠 제국내에 5경(상경, 동경, 서경, 남경, 중경)을 두고 불교를 받아 들여 곳곳에 거대한 불탑을 세우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선진적이었다고 할 각종 채색토기와 도기 등을 남겼으며, 왕족이나 귀족들 무덤에 여러 벽화를 그려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수 있게 하였다.
이어 일행을 태운 버스는 대초원을 거슬러 시린궈러멍(锡林郭勒盟)에 있는 정람기(正蓝旗)로 향했다. 장장 5~6시간에 걸쳐 약 500km를 달려야 하는 대장정이었다. 시린궈러멍의 중심지인 시린하오터(錫林浩特)시의 몽원문화박물관에서 몽골족들의 전통 생활상을 살펴본 후 원나라 상도가 있던 정람기에 도착했다. 정람기 역시 청나라(清)때 팔기(八旗) 군의 하나로 그 기치의 색깔이 남색이었기에 붙은 이름이다. 정람기의 군사는 크게 만주·몽골·한군(漢軍)으로 나뉘었으며, 청 왕조 말기에 주둔 군 수는 약 2만 6천 명을 헤아렸으며 가족들을 포함하면 약 13만 명이었다고 한다.
정람기를 찾은 이유는 이 곳의 원상도유지(元上都遗址)가 있기 때문이었다. 상도(上都 ; 제너두)는 원나라 쿠빌라이 칸이 1258년 건설한 여름 궁전으로, 북경에 있었던 대도(大都 ; 칸발리크)와 더불어 또 다른 궁전으로 쓰였다. 쿠빌라이 칸은 몽골 제국 칭기즈칸의 손자로, 제5대 칸이자 원나라 제1대 황제이다. 그는 몽골문자를 만들었으며, 수도를 몽골 내륙의 카라코룸에서 대도로 옮기고 1279년 남송을 멸망시켜 세계 최대의 대제국을 건설했다. 유럽까지 석권한 당시 원나라의 영토는 3,300만㎢, 한반도의 150배에 달했다. 이탈리아 상인 출신으로서 쿠빌라이 칸을 알현한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아담이래 가장 많은 지역과 재물, 영토를 소유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한다. 당연히 물질주의자로서의 그의 시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상도(上都)는 대제국을 건설한 원나라의 또 다른 수도인만큼 제국의 창시자 징기스칸의 웅혼한 기상이 살아 숨쉬는 곳이다. 입구에서 조금 걸어들어가자 징기즈칸의 거대한 좌상이 어깨를 떡 벌리고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좌상이라 해도 어찌나 큰 지 서있는 사람들의 키 두배는 되어 보였다. 주변에는 늘름한 몽골족 병사들이 창과 칼을 들고 눈을 번득이며 칸을 옹위하고 있었다.
원나라 황제들은 평소에는 대도에 있다가 여름에 날이 더워지면 상도로 옮겨 집무를 보았다고 한다. 정복국가의 수도였던 터라 많은 수의 군사들이 집결해 있었고 따라서 평소에도 각종 무예를 겨루는 경기를 통해 병사를 모집하고 훈련시키는 군사적 의미를 지닌 행사가 많았다. 오늘날에는 이 곳에서 나담(наадам ; 那達慕)이라는 축제가 열리는데, 이는 바로 이런 몽골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잇고 전 국민을 단결시킨다는 의미가 있는 국가적인 행사다.
몽골에서 여름에 전국적으로 치르는 나담은 몽골어로 '축제'라는 뜻으로, 국가 공휴일(Үндэсний их баяр)이다. 과거엔 군사적 의미와 함께 유목민의 삶에서 중요한 가축들의 성장과 풍요를 기원하는 종교적 의미가 강했으나 현대에 와서는 스포츠 경기를 중심으로 몽골의 전통과 문화가 강조된 행사로 그 성격이 변했다. 대개 몽골 혁명기념일인 7월초부터 며칠간 치르는데,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열리는 나담이 가장 규모가 크고 유명하다고 한다. 몽골 기마병과 전통 복식을 갖춰 입은 주민들의 행진으로 시작되며, 승마, 활쏘기, 부흐(몽골식 씨름) 등 각종 경기가 열리는데, 여기서 우승하면 후한 상금에 명예도 누리기에 인기가 좋다고 한다.
이 곳 상도유지터에도 나담이 열리는 시즌에는 열띤 스포츠 경기 외에 몽골 전통 음악 공연, 음식과 공예품 판매 등 다채로운 행사들이 열려 큰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러나 일행이 방문한 8월 2일엔 축제는 끝나고 몽골족들의 전통 가옥 '게르'를 현대식으로 개조한 건물에서 여행객들을 상대로 여러 관광상품을 팔거나, 먹거리 시식, 전통문화 공연, 예술품 전시 등이 진행되고 있었다.
☞제5편 <서토로 가는 길>에서 계속 https://www.tongildaily.com/news/articleView.html?idxno=37992
☞한가람답사노선 https://www.google.com/maps/d/edit?mid=1VVMtINZzC_bMlS6MTLEDa94CCOBqv8k&usp=sharing
양성희 기자 kotrin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