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자유발행제 따라 ‘대한민국 역사교과서(전2권)’ 발간
@사진=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
고대 한국사의 논란거리였던 한사군의 낙랑군 위치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단 갈석산 또는 고대 요동(난하) 주변으로 확정됐다. 이 곳은 중국의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소장 이덕일)가 자유발행제에 따라 내년 광복 80주년을 맞이해 발행한 ‘대한민국 역사교과서(전2권)’에 실린 한국 고대사의 한 토막이다.
1,2권으로 출간된 ‘대한민국 역사교과서’는 최근 홍산 등 중국서 발굴된 유적과 유물을 풍부하게 제시하는 등 사실 전달에 주력해 과거 일제가 왜곡한 한국 고대사의 정통성 복원에 주력했다.
또한 구석기시대부터 현대까지 100만년, 단군조선 수립부터 현재까지 반만년의 역사를 일관되게 서술해 그간 한국사에 대해 의문이 있거나 앞뒤가 맞지 않아 이상하게 느낀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갈증을 해소 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교과서는 우선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서기전 2333년 단군에 의해 고조선이 건국됐음을 사실로 인정한다. 아울러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등을 사실로 받아들여 고조선 역사의 통시적 복원을 시도한다.
상(은)나라 왕족이었던 기자는 '동래설'에 따라 서기전 12세기 (고)조선으로 넘어 와 고대 요동(난하 동쪽) 지역에 기자조선을 세웠으며, 위만은 한나라와 조선과의 전쟁이 격심하던 서기전 3세기 전후 패수(난하)를 넘어 와 기자조선의 준왕을 쫓아내고 비슷한 지역에 위만조선을 세운다. 결국 중국의 진ㆍ한과 고조선과의 실질적 국경선은 지금의 중국 북경 동쪽의 난하가 되는 것이다.
고대 낙랑군의 위치@사진=교과서1권 75p |
위만조선은 나중에 한나라 무제에게 침략당해 서기전 108년 멸망하지만 거대한 제후국이었던 고조선은 지금의 요동을 중심으로 건재했다. 다만 여러 제후국들이 힘을 키워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면서 고조선은 부여 한(삼한) 옥저 동예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여러 나라로 분리되는 '열국시대(列國時代)'를 맞는다.
5세기 말엽까지 무려 600년간 합병과 이동, 분국 등으로 복잡하게 전개되던 열국시대는 결국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5국 중심으로 재편된다. 부여(494년)와 가야(562년)가 멸망한 시기 이후로 치면 3국 시대는 불과 100여년의 짧은 시기였다는 게 이 책의 주요 내용중 하나이다.
한반도 남부를 빼고 현재 중국의 하북성 일대를 포함한 고조선의 옛 영토를 회복한 나라는 고구려이다. 고구려는 다물(多勿)사상에 따라 한과 위 등 중국 옛 왕조들과 선비족 등 북방 민족과 빈번히 충돌하면서 여러차례 위기를 맞기도 하지만, 광개토대왕에 이르러 고대 요동지역과 내몽골 지역을 포함한 동아시아 최대 영토를 개척하며 숙신(말갈) 거란 등을 거느리는 황제국으로 등극한다.
중원에 수와 당의 통일국가가 들어서면서 고구려도 결정적 위기를 맞는다. 이들 제국과 천자국의 지위를 놓고 다투던 고구려는 대부분의 전쟁에서 승리하지만 신라가 당을 끌어 들이면서 백제의 사비성(660)이 무너지고 이어 평양성(668)이 함락되면서 멸망의 비운을 맞는다.
통일신라는 초기 대부분의 고구려 영토를 회복했다가 발해의 건국으로 만주 남부 일대로 후퇴한다@사진=교과서 1권 340p |
여기서 평양성의 위치가 중요하다. 이 책은 장수왕이 천도한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 평양이 지금의 북한의 평양이 아니라 만주에 있는 요녕성 요양(遼陽)으로 비정한다. 신라가 당과 싸울 때 첫 공세가 압록강을 건넜다는 여러 사서의 기록이 그 근거이다. 최치원이 쓴 진성왕의 <양위표>에도 "본국(신라)은 백이숙제의 고죽국 강역과 연달아 있다"고 말한 기록도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이후 신라가 매소성(한탄강이 아니라 요하 주변 추정) 등지에서 당나라를 격퇴하고 통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신라의 강역은 한반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지금의 요양 일대를 포함하고 고대 요동(난하) 지역에 이르는 광대한 범위에 달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다만 곧이어 등장한 고구려와 말갈계 유민이 연합해 세운 대진국(발해)에 밀리면서 통일신라의 영토는 만주 남부지역으로 후퇴하면서 남북조시대가 열리고 두 나라는 요녕성의 니하(송하강의 지류)를 경계로 삼는다.
고려는 부침은 있었지만 대체로 현재의 만주에 있는 철령과 공험진을 경계로 북방민족들과 대치했다.@사진=교과서1권 432p |
이어 등장한 고려는 부침은 있었지만 대체로 현재의 만주에 있는 철령(심양 남쪽)과 공험진(흑룡강성 영안 부근)을 경계로 북방민족들과 대치했다. 서희가 개척한 강동6주나 윤관이 쌓은 동북9성은 모두 만주에서 찾아야 한다는 게 이 책의 주장이다. 원나라 때 일시적으로 고려가 이 지역을 잃기도 했지만 공민왕의 수복작전으로 완전히 회복했다.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를 계기로 촉발된 고려와의 분쟁에서도 비록 이성계가 위화도(압록강이 아닌 요하의 지류)에서 회군해 돌아 왔지만 기본적으로 철령과 공험진을 경계로 하는 고려의 국경선은 조선 말기까지 이어진다.
조선이 빼앗긴 간도와 연해주 @사진=교과서 251p. |
조선의 태내에서 배태된 여진족(만주족)이 후금을 세우고 중원을 정복하여 청을 세운 것은 근세사의 국경선 획정에 큰 변동을 가져온다. 청은 자신의 발상지인 만주에 대한 봉금령을 내려 출입을 금지하고 조선과 백두산 정계비(1712)를 세워 압록과 토문을 국경으로 정한다.
여기서 압록도 그렇지만 토문(土門)이 후일 해석상 논란이 되어 조선말 이중하가 토문을 송하강의 지류(5도백하)라고 주장함에 따라 조선이 관리를 파견하여 인구를 관리하고 세금을 걷는 등 실질적으로 통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일제는 1909년 청과 간도협약을 체결하여 남만주 철도부설권 등의 이권을 얻는 대신 간도를 청에 넘겨주게 되고, 이에 앞서 청은 2차 아편전쟁에서 패한 후 러시아와 북경조약(1860년)을 맺어 연해주를 러시아에 넘겨준다. 이 두 조약은 모두 소유권자인 대한제국의 승인을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불법조약이므로 우리 영토가 확실하다는 게 이 책의 주장이다.
이처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가 이번에 발행한 ‘대한민국 역사교과서(전2권)’는 근거 사료를 풍부하게 제시하는 등의 방법으로 역사실 사실 전달에 주력한다.
현행 다른 교과서에서는 통일신라이후 고려, 조선의 강역을 제대로 서술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이 시대의 국경선이 고려 때의 철령~공험진 라인을 중심으로 그 이북까지 펼쳐져 있음을 명확히 제시한다.
심지어 조선 후기까지도 청이 만주에 대한 봉금령을 내린 이후에도 조선인들이 한족과 달리 이 지역에 대한 경작 등을 목적으로 한 빈번한 출입을 통해 사실상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족이 만주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청대 말기 봉금령이 무력화된 시기이후 일제의 침략으로 혼란기에 접어든 시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교과서는 또 이 지역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아나키즘 등 다양한 독립운동이 있었음을 보여줌으로써 실증적인 방법으로 역사의 진실에 접근한다.
한편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는 ‘대한민국 역사교과서 역사교사 양성과정(전 11주)’을 진행하고 있다. 강사는 ‘대한민국 역사교과서’의 집필진 및 감수진들이 맡았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측은 “수강자들은 30여년 경력의 역사교사부터 전·현직 구청장과 청와대 비서관을 역임한 고위공직자 출신 및 대학교수들과 기업인들,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일반 시민들로 다양하다”며 “바른 역사에 대한 희구가 그만큼 크다는 사실을 말해준다”고 의미을 부여했다.
양성희 기자 kotrin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