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자식에게
편지를
쓸까
완주군 운주면 김복례 할머니
여름향기라는 이름을 가진 펜션이 눈에 들어온다. 구불구불한 2차선 국도변을 달리던 300번 버스. 운주면이라고 쓰인 녹색 간판을 지나자 길가에 크고 작은 간판들이 눈에 띈다. 여름 한철을 보내고 아스라이 남은 간판들이 스치는 운주면의 가을 풍경. 계곡의 물줄기를 따라 사람들이 줄이어 모이던 운주에 어느덧 두메산골의 차가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행여 버스가 무심히 지나칠까 마을 입구에 마중을 나오신 김복례 할머니. 길가의 이정표처럼 꼿꼿하게 서있던 할머니 덕분에 무사히 하차할 수 있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정거장이 있어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도 가쁜 숨을 몰아쉬는 김복례 할머니.
암시랑 안했는디 자식들이 병원 가서 검사 한번 받자고 해서. 백오만원 쓱이나 주고 검사를 했는디 폐에 혹이 있다고 그려. 글서 6년 전인가 서울대병원 가서 수술하고 왔어. 둘째아들 때무에 살고 있어. 안 그럼 죽었지. 우리 둘째아들이 서울대병원 델꼬 갔거든. 수술 받고 나서 차차 해가 갈수록 숨이 가빠. 조금만 걸어도 숨이 가빠.
한글교실 다닌 지는 4년인가 됐나. 내가 여그 고당리에서 제일 오래 다닌 학생이야. 한 때 사람 많을 적에는 오십명 가깝게 댕겼는디 지금은 열 댓명 밖에 안 돼. 고당리에 서는 두 명 댕기고. 테레비에 몇 시에 뭐가 나오는지 그 전에는 몰랐는디 지금은 글씨를 알은 게 케이비에스서 몇 시에 뭘한다 엠비씨서 몇시에 뭘 한다 알아서 좋아. 전에는 미원인지 맛소금인지도 모르고 살았어. 유통기한 알아서 얼매나 좋은지 몰라. 가격도 볼 중 알고.
한글 배워서 자슥들한테 편지를 썼거든. 그걸 한글학교 선생님이 편지 보내줬어. 아(얘)들은 편지는 안 쓰고 말로는 뭐라 하데. 근데 뭐라 했는지는 잊어버렸어.
자식은 6남매. 4남2녀 뒀어. 우리 첫째는 전주 살고 둘째는 서울 살어. 내가 큰 아들은 형이라고 옷도 사입히고 가르치기도 했어. 근데 둘째는 옷도 형이 입던 것만 입히고 쌀밥 달랬는데 쌀밥도 못 주고, 맨 감자 주고 보리밥 줬거든. 쌀밥 먹고 싶다고 울어도 내가 못주고…. 그 아들이 하도 걸려서 글 배우고 처음으로 둘째한테 편지를 썼어. 지금은 잘 살어. 그래도 가슴에 남아있네. 그래서 그랬어. 고생을 시켜서. 이제는 좀 내려놔도 되는디 그래도 그려.
우리 자슥들 잘 살어, 부모한테도 잘 하고. 내가 지 애비랑 고생해서 지들 키운 거 다 알지. 우리가 증말 암껏도 없었어. 부모한테 받은 것도 없고 순전히 일해가지고 키웠어. 그래서 달라는 것도 못 주고 양말도 지어서 신겨 보내고…. 그것을 알지. 나 한글학교 댕긴다고 자슥들이 좋아해. 이제 놀러댕기고 하라고.
명절이면 내가 전주 있는 큰 아들 아들 집으로 나가. 여긴 나 혼자 있응게. 여기는 춥기도 하고. 곧 있으면 설이 잖어. 설날이 기다려지네. 내 나이는 칠십팔살. 첫째 아들이 쉰아홉인가 여덟인가 그러고 둘째가 쉰셋인가 넷인가. 자꾸 숫자가 올라가니까 통 모르것어.
이상호 기자 sanghodi@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