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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눈] 다시 찾은 안산, 다시 쓰는 세월호 단상

기사승인 2019.12.30  13: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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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태윤 선임기자

안산에는 상록수역이 있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배경이어서 소설 제목이 역명이 되었다. 작가 최용신은 소설 속 여주인공인 채영신처럼 실제 소설 같은 삶을 살았다. 아파트에 둘러 쌓인 작은 언덕 위에 최용신의 묘가 있다. 브나로드 운동에 청춘을 받치고 26세의 꽃다운 나이에 요절한 그의 유훈이 묘비에 적혀 있다.

단원구라는 지명도 엄청난 무게로 다가 온다. 단원 김홍도는 민중들의 삶을 소탈하게 잘 그렸던 조선 후기 3대 화가다. 안산은 우리 근현대사의 기록실 같은 도시이다. 

세월호로 희생된 단원고의 어린 영혼들이 마지막까지 재잘거리던 영상을 보면 아직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 사건의 원인을 덮으려는 힘이 그렇게 강한가? 어쩌면 오천만이 다 외쳐도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삼풍백화점 사고 때 많은 시민들이 삽 들고 모였던 것처럼 세월호 때도 팽목항으로 민간잠수사들이 많이 갔다. 해군의 방해를 뚫고 들어 갔지만 그들은 국가로부터 고소를 당하고 실형까지 살았다. 지금도 여전히 고통을 당하고 있다. 왜냐고 물어도 대답해 줄 사람이 없다.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도망갔던 선조는 왜병이 물러 가자 대대적으로 의병을 토벌했다. 의병장 고경명은 금산전투에서 전사했고 김덕령은 경상도까지 진출하여 큰 전과를 올렸지만 역적으로 몰려 목숨을 잃었다. 그렇게 의병들은 왜적을 기다리지 않고 멀리는 함경도까지 찾아 가 싸웠다. 그러나 선조는 나라를 구한 공보다는 자기의 정치적 부담이 될 사람들을 가만 놔 두지 않았다. 선조의 소욕(小欲)으로 조선은 임란 이후에도 계속 정치적 혼란에 빠진다.

이승만은 북이 내려 오자 한강다리까지 끊고 도망갔다. 백성들이 얼마나 피난갈 수 있었겠는가? 서울이 수복되자 피난 안 간 사람들을 무수히 죽였다. 또 그런 일이 있으면 무조건 텅 비워 두고 도망 가야 할까? 목숨 걸고 남아 있는 것도 백성들이 할 수 있는 호국의 길 아닌가?

세월호로 가족과 자녀를 잃은 유족들은 이제 희망의 절벽 끝에 서 있다. 유족 중 한 분이 우울증에 시달리다 스스로 귀한 목숨을 스스로 끊었다. 정권이 바뀌고도 진상조사엔 진전이 없다. 늦춰질 수록 유족들의 고통은 더 커질 것이다. 그러길 바라는 걸까? 유족들은 구원파가 뿌려댄 정치자금으로부터 여야 모두가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라고 일침을 날린다. 어쩌다 양비론? 다시 확인해도 마찬가지다. 불신 보다 괴로운 일이 있을까?

부모의 자녀 사랑은 당위를 넘어 선 실존이다. 어린 생명이 스스로 살아 갈 수 있을 때까지 지켜내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모성애다. 그러기에 자식 잃은 슬픔은 그 만큼 클 수 밖에 없다. 

세월호는 모두에게 불행한 사건이다. 그러나 불행은 우리의 정신을 깨워낸다. 살아 남은 자들에게 소중한 삶을 더 소중하게 살아 가라고 한다. 한 학생은 '죽기 싫다'고 했고 어떤 학생은 구명조끼를 양보하기도 했다. 그렇게 어린 생명들이 죽어 갔다. 아들 곁을 찾아 간 고인의 영정사진이 너무 젊다. 오늘은 하늘도 운다.

사진=백태윤기자

 

 

 

백태윤 선임기자 pacific100@naver.com

<저작권자 © 축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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